수영장에서의 기록은 단지 근육과 폐활량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기술이 물살을 가르며, 경기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습니다. 몇 밀리미터의 표면 차이, 몇 퍼센트의 압박력. 그 모든 것이 수면 위에 남긴 기록을 바꾸었습니다. 특히 한 시기, 특정 수영복이 쏟아낸 세계신기록은 스포츠 과학의 경계를 다시 쓰게 했습니다.
목차:
- 표면의 과학, 골프공에서 시작된 이야기
- 상어 비늘에서 영감 받은 수영복
- 전신 수영복과 신기록의 상관관계
- 진짜 비밀은 '피부 표면적'에 있었다
- 상어보다 똑똑했던 인공 소재
표면의 과학, 골프공에서 시작된 이야기
단순한 무늬처럼 보이는 골프공의 보조개 구조. 그러나 그 속엔 정교한 유체역학 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한 이 패턴은 ‘디플(Dimple)’이라 불립니다. 디플은 표면에 난류를 유도해 뒤쪽 압력 강하를 억제하며 형상 저항을 줄여줍니다.
빠르게 날아가는 공은 공기 흐름을 반으로 쪼개며 진행합니다. 이때 표면이 매끄러우면 흐름이 중간에서 분리되며 압력 차를 만들고, 그 결과 비거리가 짧아집니다. 하지만 디플이 난류를 유도하면 이 흐름 분리가 뒤쪽에서 일어나, 항력의 절대값이 줄어듭니다.
이처럼 작고 단순한 패턴이 물리적인 성능을 극대화하는 사례는 공기뿐만 아니라 물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수영복에 접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게 됩니다.
상어 비늘에서 영감 받은 수영복
1980년대 초, NASA의 연구원 M.J. 월시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합니다. 상어 피부에서 볼 수 있는 미세한 돌기 구조가 공기 중에서 마찰 저항을 감소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V자 형태의 미세 홈들은 높이가 1mm도 되지 않지만, 유체와의 마찰을 8% 가까이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발견은 곧 물속 스포츠에 응용됩니다. 물 역시 유체이기 때문에, 상어가 이 구조를 이용해 빠르게 헤엄치는 것이라면 인간도 이를 모방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이 제기됩니다. 실제로 상어의 피부에는 미세한 비늘 구조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물과의 마찰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고 알려졌습니다.
결과는 빠르게 산업화로 이어졌습니다. 199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이미 수백 명의 수영 선수가 ‘Speed®’라는 신소재 수영복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이 수영복은 상어 비늘의 표면을 모방해 발수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으며, 물속 저항을 줄여준다는 기대를 모았습니다.
전신 수영복과 신기록의 상관관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수영 팬이라면 잊지 못할 대회였습니다. 호주의 수영 스타 이언 소프는 Fastskin이라는 새로운 수영복을 입고 3관왕에 오르며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 수영복은 상어 비늘에서 영감을 받은 특수 섬유로 만들어졌고, 그의 놀라운 기량과 함께 세계는 이 신소재에 주목하게 됩니다.
올림픽 이후 전신형 수영복은 빠르게 대세로 자리잡습니다. 2004년 아테네에서는 이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이 금메달을 휩쓸었고, 2008년 베이징에서는 무려 108개의 세계 신기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2009년, 전 세계 수영계는 충격을 받습니다. 로마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독일의 비더만 선수가 황제 펠프스를 꺾은 것입니다. 그가 입은 수영복은 아레나의 X-Glide라는 모델로, 상어 비늘뿐 아니라 100% 폴리우레탄 스판덱스로 만들어진 완전한 전신 수트였습니다.
이 수영복은 단지 표면 구조만 바뀐 것이 아니라, 선수의 몸 전체를 강하게 조이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결과는 기록 단축. 그리고 논란. 기술로 만든 기록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진짜 비밀은 '피부 표면적'에 있었다
상어 비늘이 마찰을 줄여준다는 가설은 널리 퍼졌지만, 실제로 성능 향상을 이끈 요소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부의 표면적 감소였습니다.
스판덱스 수영복은 마치 전신 코르셋처럼 작용합니다. 인체는 본래 매우 유연한 조직으로 되어 있어, 압박을 가하면 형태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한 압력은 늘어진 피부를 단단히 감싸며 유선형으로 재구성합니다.
이는 단지 보기 좋은 몸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체와의 접촉 면적 자체를 줄이는 효과를 만듭니다. 접촉 면적이 줄어들면 마찰도 감소하고, 그 결과 수영 속도는 빨라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신 수트를 입었을 때 피부의 표면적은 최대 30%까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또한 스판덱스 함량이 높을수록 압박 효과는 강해지고, 수영복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 효과는 커집니다. 결국 수영복은 반신을 넘어서 팔과 다리 전체를 감싸는 풀 바디 디자인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상어보다 똑똑했던 인공 소재
결정적인 반전은 2016년, 미국 뉴욕주립대 연구진의 실험에서 밝혀집니다. MIT와 공동 진행된 슈퍼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상어 비늘은 물과의 마찰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항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기와 물은 모두 유체지만, 마찰 계수와 흐름 방식은 매우 다릅니다. 이 실험은 인간이 만든 인공 섬유가 오히려 자연계보다 효율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상어 비늘 수영복이 퇴출된 것이 '자연의 기술'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신 수영복의 진짜 무기는 섬유공학의 결정체인 스판덱스와 피부 표면적 감소라는 냉정한 과학적 사실이었습니다.
기록은 쏟아졌고, 그 기록은 기술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수영연맹은 결국 기술 도핑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신 수영복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게 됩니다.
결국 상어보다 더 빠른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