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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공 폭발에서 시작된 섬유, 레이온

by 텍스타일 2025. 3. 27.

 

당구공에서 시작된 섬유 혁신, 레이온

 

한때는 당구공이 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완벽한 샷이 공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당구공의 소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공은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는데, 이 물질은 화약과 같은 성질을 지닌 위험한 플라스틱이었죠. 놀랍게도, 이 셀룰로이드는 훗날 인류 최초의 인조섬유인 레이온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폭발에서 시작된 섬유의 여정, 지금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차

 

상아 대신 플라스틱, 당구공에서 시작된 섬유 혁신

 

19세기 중반, 당구는 상류층의 인기 오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구공의 주요 소재였던 상아는 코끼리 수의 감소와 함께 점차 희귀해졌습니다. 공급 불안은 곧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고, 대체재 개발이 절실해졌습니다.

 

미국의 한 당구용품 업체는 상아를 대체할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는 사람에게 큰 상금을 걸었습니다. 이 공모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개발한 것이 셀룰로이드였습니다. 이는 셀룰로오스를 질산과 반응시켜 만든 니트로셀룰로오스 기반 플라스틱으로, 그 자체가 화약과 유사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실제로 당구공끼리 강하게 충돌하면 폭발음이 날 정도였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셀룰로이드 공이 맞부딪쳐 터졌을 때 총소리로 오인한 사람들이 놀라 경찰을 부른 일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셀룰로이드는 단지 당구공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이 신소재는 영화 필름, 빗, 장난감, 단추 등 다양한 제품으로 활용되었고, 섬유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셀룰로오스를 화학적으로 가공하여 실처럼 뽑아내는 개념이 이 시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나무에서 실을 뽑다: 레이온의 탄생

면은 식물에서 바로 추출 가능한 섬유입니다. 반면 나무는 셀룰로오스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지만, 섬유 형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단단해 직접 방적이 불가능합니다.

 

레이온은 바로 이 점을 해결한 인류 최초의 인조 섬유입니다. 목재를 잘게 부순 후 펄프 형태로 만든 뒤, 이를 화학적 용액에 녹여 끈적한 액체 상태로 변환합니다. 이 액체를 노즐로 밀어내며 가늘고 긴 섬유를 생성하는 방식이 바로 레이온의 제조 과정입니다.

 

문제는 셀룰로오스가 자연적으로는 극히 안정적인 고분자라는 점입니다. 쉽게 녹지 않기 때문에, 이를 녹이기 위해 다양한 화학 반응이 시도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방식이 바로 ‘비스코스 공정’입니다.

 

비스코스 방식은 이황화탄소라는 독성이 강한 용매를 사용하는 공정입니다. 이로써 고체 셀룰로오스를 액상으로 전환할 수 있었으며, 비교적 균일한 섬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안전성과 환경 문제라는 새로운 숙제를 안기게 됩니다.

 

레이온, 면인가 실크인가?

레이온은 외형적으로 실크를 닮았습니다. 은은한 광택, 부드러운 흐름성, 드레이프성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인조 실크(Artificial Silk)’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면과 거의 동일한 성분을 갖고 있습니다.

 

레이온과 면은 모두 순수 셀룰로오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면은 식물의 씨앗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섬유이고, 레이온은 나무에서 화학적으로 뽑아낸 섬유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레이온은 실크처럼 보이면서도 면처럼 숨 쉬고, 염색이 잘되며 흡습성도 우수합니다. 이중적인 특성 덕분에 ‘실용적인 실크’로서 20세기 초부터 대량으로 생산되며 시장에 자리잡았습니다.

 

1924년, 미국 상무부는 이 섬유에 ‘Rayon’이라는 이름을 공식 부여합니다. 여기서 Ray는 광선을, on은 cotton(면)의 마지막 음절을 의미합니다. 즉, 빛나는 면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레이온은 외형과 성분이 다르고, 성능과 이미지는 상반된 섬유입니다. 그래서 ‘섬유계의 야누스’라고 불릴 만큼, 두 얼굴을 가진 소재로 평가됩니다.

 

폭발을 피한 섬유, 독성을 남기다

셀룰로이드의 인화성 문제를 극복한 레이온은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완제품 기준일 뿐, 생산 과정에서는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비스코스 공정에서 사용되는 이황화탄소는 강력한 신경 독성을 가진 물질입니다. 초창기 레이온 공장에서는 작업자들이 어지럼증, 손 떨림, 만성 피로 등의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신경계 장애와 심각한 중독 사례도 보고되었습니다.

 

당시 산업 현장은 안전 장비도 부족했고, 환기 시설 역시 미비했습니다. 노동자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레이온은 이른바 ‘조용한 위험’을 가진 섬유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온은 매끄럽고 염색이 잘되며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에서 빠르게 시장을 장악합니다. 드레스, 블라우스, 커튼, 침구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랑받았으며,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같은 환경과 건강 문제를 개선한 새로운 방식의 레이온, 예를 들어 모달(Modal)이나 리오셀(Lyocell)이 개발되어 친환경 섬유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섬유, 과거에서 길을 찾다

지속가능성은 오늘날 섬유 산업의 핵심 가치입니다. 합성섬유는 미세플라스틱 문제와 탄소배출이 문제이고, 천연섬유는 농약 사용과 토지 과잉 소모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레이온은 자연 유래 소재로 시작되지만, 화학 공정을 거쳐 완성된 중간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친환경과 기술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가 됩니다.

 

레이온은 재료가 나무에서 오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재생 가능한 자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화학물질 사용과 폐수 처리가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최근의 친환경 트렌드는 단순히 ‘천연이냐 합성이냐’를 넘어,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집중합니다. 레이온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조 과정의 안전성과 환경 영향을 최소화해야 진짜 친환경 섬유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레이온은 폭발적인 시작에서 비롯된 섬유이지만, 오늘날에는 지속가능한 기술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소재가 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레이온은 여전히 ‘미래형 섬유’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